약천골의 유래
약천(藥泉)이라는 이름은 고려(?) 때 남쪽의 어떤 선비가
신병이 있어 물 좋은 곳을 찾아 다녔었는데, 이 곳 망상에 와서
물을 먹고 몸이 나아 서울서 높은 벼슬을 얻었다고 합니다.
동네에서는 이때부터 이 우물을 약천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약천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약천남구만
후에 이곳이 더욱 유명해진 계기는 약천 남구만 선생이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부터입니다.
남구만은 조선조 숙종 15년인 1689년 장희빈 소생인 균(均)의 세자책봉을 강행하는 숙종의 뜻을
거역했으며 또 이를 옹립하고 지지하던 남인(南人)의 득세에 밀려 동해시 망상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약천 선생은 이곳에 와 있는 동안 망상의 경치에 매혹되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완상하고, 심곡의 샘이
약천이라는 말을 듣고, 약천 샘물 맛을 보고 자신의 아호와 일치하여 즐거워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김종호의 「심곡사적기」)
권농가
특히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전원의 목가적 풍경과 느긋하고 소박한 토착민들의 농경생활에 심취해
숙종 1690년, 경오년 봄에 한국 시조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권농가(勸農歌)를 창작했습니다.
이 시조는 민초들의 검소하고 평화로운 농촌풍경과 남구만 자신의 인생의
허무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천사
민들은 남구만의 높은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되는 정조 정미년인
1727년부터 심곡마을에 약천사(藥泉祠)를 세우고 그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려오고 있습니다.
약천이란 샘물은 약천 선생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는 하나 오늘날 약천과
남구만 선생의 호와 같은 이곳의 약천 샘은 그 역사적 의미로서 그 가치 또한 크다 하겠습니다.